자기이해와 철학

나는 어떤 환경에서 더 나다워지는가 – 공간과 정체성의 연결

joy113 2025. 7. 5. 20:28

공간과 정체성의 연결

 

 

공간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사람은 공간 속에서 살아가지만, 동시에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 익숙한 방의 구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각도, 책상 위에 놓인 사소한 물건들까지. 우리는 매일같이 어떤 공간 속에 머무르고, 그 공간이 우리 내면에 미치는 영향을 거의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한 번쯤 멈춰서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어디에서 더 나다워지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공간에서 내가 내 감정을 더 잘 표현하고, 사고가 더 깊어지고, 나의 본모습에 가까워지는지를 묻는 물음이다. 다시 말해,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정체성의 반영이며 촉진자’다. 이 글에서는 공간이 정체성에 미치는 철학적 영향, 내가 더 나다워질 수 있는 환경의 조건,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일상 속에서 그런 공간을 의식적으로 조성할 수 있을지를 탐구한다.

 

공간은 정체성을 반영한다 – 나를 말하는 환경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공간을 단지 물리적 구조가 아니라 감정과 기억의 저장소로 보았다. 우리가 특정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거나, 반대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 공간이 단지 물리적인 장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공간에 담긴 감정, 경험, 상호작용이 나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북적이는 카페에서 오히려 집중이 잘 된다. 사람들의 소리와 움직임이 사고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반면 또 다른 사람은 조용한 서재에서야 비로소 자기 생각에 몰입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취향 차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내면과 접속하는지를 보여주는 정체성의 한 방식이다.

환경은 인간의 마음을 반영한다. 내가 머무는 공간은 결국 내가 스스로에게 어떤 삶을 허용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고 싶은지를 드러낸다. 공간이란 결국 ‘나의 내면이 바깥으로 표현된 형태’다. 더 나다워질 수 있는 공간은, 곧 내가 나를 자유롭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왜 어떤 공간은 나를 위축시키는가 – 환경과 감정의 구조

우리는 왜 어떤 공간에서는 말조차 조심스럽고, 어떤 공간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자유로워지는가? 이는 단순히 인테리어나 소음 때문이 아니라, 공간이 갖는 ‘상징적 권력’과 ‘감정적 기억’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상사의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 느끼는 긴장감은 단순한 역할 구조를 넘어서, 내가 가진 자율성과 자존감이 공간에 의해 위축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자주 꾸중을 들었던 거실에서 여전히 편하지 않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공간은 기억을 저장하며, 그 기억은 감정을 낳고, 그 감정은 나의 반응을 결정짓는다.

더 나다워지는 공간이란, 나의 감정을 안전하게 꺼낼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방어적일 필요가 없고, 내가 스스로를 숨기지 않아도 된다. 반대로, 위축되는 공간은 나를 제한하고 규정지으며, 자기 표현을 억제하도록 만든다.

공간은 심리적 환경이기도 하다. 내가 있는 물리적 장소만이 아니라,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 분위기, 분위기를 조성하는 규칙들까지도 ‘환경’에 포함된다. 그래서 어떤 공간은 조용하지만 통제되어 있고, 어떤 공간은 복잡하지만 자율적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는가’다.

더 나다워지는 환경의 조건 – 감정적 안전성과 선택의 자유

그렇다면 나는 어떤 환경에서 더 나다워질 수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철학적 관점에서 몇 가지 공통된 조건이 있다.

첫째, 감정적으로 안전한 공간이다. 이것은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환경이다. 여기에선 말실수를 해도 비난받지 않고, 감정을 솔직하게 꺼낼 수 있다. 나다움은 위험 앞에서 발휘되지 않는다. 안전해야 비로소 진짜 나로 존재할 수 있다.

둘째, 물리적 구조가 내가 선호하는 사고와 행동을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생각이 많아질수록 창문이 넓은 방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고, 집중이 필요할수록 벽과 책이 둘러싼 구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공간의 구조는 곧 생각의 구조를 반영한다.

셋째, 선택의 여지가 있는 공간이다. 나다움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더 발현된다. 내가 어디에 앉을지, 무엇을 꺼내놓을지, 어떤 조명과 색을 선택할지 결정할 수 있을 때, 공간은 나의 연장이 된다.

넷째, 시간과 속도를 허락하는 환경이다. 현대인의 많은 공간은 빠른 전환과 집중을 요구한다. 하지만 진짜 나로 살아가려면, 느릴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멍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 조용히 생각을 따라가도 괜찮은 공간은 자기 정체성 회복에 큰 역할을 한다.

일상에서 나다운 공간을 만드는 방법

나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큰 집이나 특별한 장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다루는 태도다.

첫째, 매일 머무는 공간에 나만의 물건을 하나씩 더해보자. 그것이 향기든, 작은 조명이든, 손때 묻은 책 한 권이든. 그것은 ‘이 공간은 나에게 허락된 곳이다’라는 무언의 선언이 된다.

둘째, 하루 30분이라도 ‘내가 아무것도 강요받지 않는 장소’에 머무는 연습을 해보자. 그것이 침대 위일 수도 있고, 가까운 공원일 수도 있다. 그곳에서는 목적 없이 존재하기만 해도 된다.

셋째, 공간을 정리할 때는 ‘나의 감정’을 기준으로 정리해보자. 보기만 해도 숨 막히는 물건은 치우고, 볼 때마다 기분 좋아지는 요소들을 더해보자. 공간의 정리는 곧 내면의 정돈이다.

넷째, 말과 소리를 점검해보자. 공간은 내가 쓰는 언어와도 연결된다. 부정적인 말과 목소리가 가득한 공간은 나를 위축시키고, 따뜻한 말이 오가는 공간은 나를 열게 만든다.

공간은 거울이다 – 나다운 삶의 토대

결국 공간은 거울이다. 어떤 공간에 오래 머물수록, 나는 그 공간의 기운과 구조를 내면화하게 된다. ‘나다움’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공간이라는 구체적 조건 위에서 실현된다.

‘나는 어디에서 나다워지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어디에서 나를 가장 덜 숨기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곳이 곧 나에게 필요한 환경이다.
공간을 고르는 것은 삶의 방향을 고르는 것이고,
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정체성을 지켜내는 방법이다.

그 공간이 반드시 조용하고 깨끗할 필요는 없다.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나다운’ 곳이다.

마무리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과 기억의 저장소이며,
우리 정체성과 긴밀히 연결된 삶의 조건이다.

내가 더 나다워질 수 있는 환경은
감정적으로 안전하고,
자율적인 선택이 가능하며,
느림과 사색을 허용하는 공간이다.

공간은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나다운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곧 나다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작고 조용한 철학적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