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은 결함이 아니라 존재의 한 방식이다
“나는 왜 남들과 다를까?”
많은 사람이 인생의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학교, 직장, 사회에서 우리는 흔히 평균에 맞추기를 요구받는다. 같은 언어, 같은 옷차림, 같은 방식의 성공이 ‘정상’처럼 받아들여진다. 이 기준에 어긋나면 ‘다르다’고 불리고, 다르면 종종 ‘이상하다’는 눈총을 받는다. 그렇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다르지 않으려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철학은 이와 다르게 말한다. ‘다름’은 이상하거나 부족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이자 정체성의 시작점이다. 내가 타인과 같지 않다는 사실은 결코 부끄러움이 아니라, 고유성의 증거이자 나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자격이다.
실제로 나라는 존재는 절대적으로 동일한 누구와도 같을 수 없다. 외형뿐만 아니라 감정, 사고방식, 기억, 욕망, 가치관 모두가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균화된 자아’를 연기하며 살아가려 한다.
이 글에서는 정체성이란 무엇인지, 왜 우리는 다름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 철학자들이 말한 ‘다름의 가치’, 그리고 자기다움을 실천하는 철학적 방법에 대해 깊이 있게 탐색해본다.
철학이 말하는 정체성: 동일성 아닌 다양성의 합
‘정체성’이란 단어는 흔히 ‘나의 고유함’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이를 ‘일관성’, 혹은 ‘정해진 틀’로 오해한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정체성을 ‘하나의 고정된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정체성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다양한 모습이 공존하는 복합적 구조라고 해석한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자아란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개방적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즉, 나라는 존재는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라, 타자와의 비교 속에서 점차 ‘구성되는’ 무엇이다.
데리다는 “정체성은 동일성이 아닌 차이 속에서만 확인된다”고 강조했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나는 저 사람과 어떻게 다른가”**를 명확히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은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에서 ‘되기(becoming)’의 철학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은 끊임없는 생성의 과정임을 강조했다. 그들은 말한다. “당신은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중이다.”
이 철학적 관점은 우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해로운지를 깨닫게 해준다. 다름은 정체성의 일탈이 아니라 진짜 출발점이다.
왜 우리는 ‘다른 나’를 두려워하고 숨기게 되는가?
이 질문의 답은 ‘사회적 통제’와 ‘비교의 구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소속감을 추구한다. 소속은 생존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무리 속에서 튀지 않기를, 눈에 띄지 않기를 학습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정의하며, 공동체 속 인간의 위치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 공동체가 ‘획일성’을 강요하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다름을 ‘결핍’으로 여기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점점 타인의 기준에 나를 맞추고, 스스로의 고유성을 검열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비본래적 존재 방식’이라 지적했다. 그는 “대중의 시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기 존재의 본질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고 말한다. 이 말은 단순한 철학적 이상이 아니라, 오늘날 현실의 모습 그 자체다.
SNS에선 ‘평균의 정답’처럼 보이는 삶이 넘쳐난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모델로 삼고, 그에 맞춰 나의 일상을 수정한다. 그러면서 점점 ‘진짜 나’는 무너진다.
니체는 “너 자신이 되어라(Werde, der du bist)”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이 명제를 통해 자기 안에 내재된 가능성과 차이를 외면하지 말고, 오히려 드러내고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는 다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법만 배웠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는 자기이해와 자존감의 핵심이다
자기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존중과 신뢰의 문제, 즉 자기를 대하는 삶의 태도와 깊이 연결된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타인을 사랑하는 전제가 된다”고 말한다. 이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다. 나의 결점, 나의 차이, 나의 불안정함까지 포괄해서 **“이런 나도 괜찮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을 비로소 사랑하게 된다.
보부아르는 "여성은 여성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하며, 사회가 규정한 정체성과 개인의 고유한 자아 사이의 긴장을 지적했다.
이 개념은 성별을 넘어서 모든 인간의 정체성에도 적용된다. 나는 남들과 같아야만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나의 다름은, 나만이 줄 수 있는 시선과 가치를 의미한다.
다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낼 수 있다는 건 곧, 내가 내 삶을 주도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 삶에 책임을 지려는 자세는 ‘진짜 자존감’의 토대가 된다.
정체성의 다양성은 결국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철학적 태도이며,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나를 지켜내는 심리적 면역력이다.
다름을 실천하는 법 – 철학적 자기 표현 훈련
남들과 다른 나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머리로는 이해되어도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우리는 오랜 시간, ‘비슷해야 안전하다’는 믿음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름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이고 꾸준한 자기 표현 훈련이 필요하다.
첫째, 비교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비교는 ‘타인의 기준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다. 비교하지 않는다는 건 내가 선택한 기준으로 나를 바라보는 힘을 키우는 일이다.
둘째, 자신의 감정과 반응을 수치심 없이 기록하자. 하루에 한 문장씩, 오늘 내가 남들과 다르게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을 적어보는 것이다. 이 기록은 스스로를 이해하고, 자신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기반이 된다.
셋째, 의도적으로 나다움을 드러내는 경험을 하자. 복장, 글쓰기, 말투, 감정 표현 등 작은 행동 하나에서부터 “나는 이렇게 느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철학적으로 이것은 **‘실존을 선택하는 행위’**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나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도 바꿔야 한다.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는 연습은 결국 자신의 다름도 인정하는 감각을 키워준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눈은 곧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관점을 성장시킨다.
마무리 요약
-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차이와 다양성 속에서 구성되는 열린 개념이다.
- 우리는 사회적 기준에 길들여져 ‘다른 나’를 억누르며 살아왔지만, 철학은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이야말로 자기이해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 나의 다름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짜 자존감과 자기 존중을 회복할 수 있다.
- 철학적 실천은 비교를 멈추고, 감정을 기록하고, 의도적으로 나다움을 드러내는 것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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