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산다'는 말이 가장 어려운 이유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이런 말을 듣는다.
"그냥 너답게 살아."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네 인생을 살아."
말로는 쉬워 보인다. 하지만 정작 ‘나답게 산다’는 건 매우 어렵다.
나는 누구이고, 나다운 삶이란 어떤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막막함을 느낀다. 왜일까?
현대인은 끊임없는 선택과 판단 속에서 살아간다. 진로, 직장, 인간관계, 가치관, 라이프스타일까지 매 순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한다. 그런데 이 선택들이 정말 ‘내가 원하는 선택’일까, 아니면 ‘사회가 요구하는 선택’일까?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나는 왜 내가 아닌 누군가처럼 살고 싶어 하고, 왜 그렇게 살게 되었는지를 묻는다.
이 글에서는 '나로 살아가는 것이 왜 어려운가'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 사회 구조와 자아 형성의 문제
- 철학자들의 자아 억압 개념
- 현대인의 정체성 혼란의 원인
- 그리고 ‘나답게 사는 것’을 실천하는 철학적 방법
을 총체적으로 탐색해본다.
사회는 우리에게 ‘나’를 숨기라고 가르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나'로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부모가 주는 이름으로 불리고, 학교에서는 또래와 비교되며 평가받고, 사회에선 직업과 성과로 판단받는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사회가 만든 틀 안에서 자신을 조립당한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이를 **‘사회적 자기(self)’와 ‘진정한 자기(real self)’**의 분리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사회가 기대하는 모습에 맞춰 ‘사회적으로 승인된 나’를 연기하는 법을 배운다.
- “너는 착해야 해.”
- “너는 성실해야 해.”
- “너는 남들보다 잘해야 해.”
이러한 기준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면에 내재화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사회가 준 기준이 곧 나의 자아처럼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 상태에서 '진짜 나'를 말하려고 하면, 죄책감이나 불안이 동반된다. 왜냐하면 그 '진짜 나'는 기존 질서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삶을 **‘비본래적 존재 방식’**이라 불렀다. 그는 "우리는 타인의 기대 속에서 살며, 진짜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남이 원하는 나’로 살다 보면, 결국 나는 나로 살아본 적도 없게 되는 것이다.
자아 억압의 철학적 구조: ‘보여지는 나’의 중독
‘나로 산다’는 것이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보여지는 나’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보여주기 위한 삶’을 요구한다.
SNS는 그 전형적인 플랫폼이다. 우리는 팔로워, 좋아요, 조회수로 자신의 가치를 측정하며, 점점 더 ‘남들이 보기 좋은 나’를 만들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진짜 자신이 무엇인지 점점 흐려진다.
- 나는 진짜로 이 옷이 좋은가?
- 이 여행이 나를 위한 건가, 보여주기 위한 건가?
- 나는 진짜 이 일을 하고 싶은 건가?
이런 의문들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보여지는 나에 몰입하게 된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이를 **‘시뮬라크르(simulacre)’**라고 불렀다.
즉, 원본 없는 모방, 실제가 없는 연출.
현대인은 진짜 자기를 잊고, 이미지를 소비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니체는 일찍이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비판했다.
그는 “도덕은 인간의 삶을 규격화하고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우리가 착한 사람, 성실한 사람, 남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는 이유는
‘강요된 자아’의 틀 속에 안주하려는 심리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살수록,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은 사라지고, 자아는 스스로를 억압하게 된다.
정체성의 혼란은 ‘나로 살고 싶은 욕망’과 ‘그럴 수 없다는 공포’의 충돌
사람들은 스스로를 이해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그대로 드러내면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불안도 함께 느낀다.
이 모순이 정체성 혼란의 핵심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은 나를 객체화한다”고 말했다.
즉, 내가 누군가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신경 쓰이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 속에 갇힌 대상이 된다.
이 감정은 너무 익숙하다.
- 발표할 때, 나답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답만 말하려 한다.
- 친구들과 있을 때, 내가 아닌 누군가처럼 행동한다.
- 때로는 내 의견보다 분위기를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우리는 점점 ‘내 감정’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반응’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나’는 사라지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가면들만 남는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인간은 결국 자기 배반의 습관을 갖게 된다.
- 나는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없어.
- 나는 튀면 안 돼.
- 나는 이 모습으로는 사랑받지 못해.
이러한 생각은 ‘나로 살아가는 것’을 ‘위험한 선택’처럼 느끼게 만들고, 그 공포 속에서 우리는 점점 자기억압을 당연한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나로 산다’는 선택을 위한 철학적 실천 방법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시 ‘나답게’ 살 수 있을까?
철학은 추상적인 개념처럼 보이지만, 실은 삶을 바꾸는 구체적인 실천 방식이다.
첫째, 타인의 시선에서 한 걸음 떨어져 보기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라는 질문이 들릴 때,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야 한다.
“나는 이 상황에서 진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가?”
철학자 스토아 학파는 ‘내 통제 밖의 일에 개입하지 말라’고 말했다.
타인의 평가는 나의 통제 밖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나의 의지’와 ‘나의 판단’에 집중해야 한다.
둘째,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지 말고 적어보기
우리는 자주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한다.
"지금 화나면 안 돼.", "이건 유치한 감정이야."
하지만 철학자 스피노자는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로 규정했다.
욕망은 억제 대상이 아니라 이해와 해석의 대상이다.
하루 5분이라도 감정 일기를 쓰는 연습은, 내가 나를 이해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다.
셋째, 작게라도 나를 표현해보기
‘나로 산다’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니다.
- 의견을 말할 때 조금 더 솔직하게
- 대화를 할 때 감정을 담아 표현해보기
- 평소보다 조금 더 나다운 옷을 입기
이러한 사소한 행동들이 반복되면,
'남을 위한 삶'에서 ‘나를 위한 삶’으로 전환된다.
이것이 바로 철학자 들뢰즈가 말한 **“되기(becoming)”**의 상태다.
내가 되어가고 있다는 감각은, 스스로를 회복하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신호다.
마무리 요약
- 우리는 사회적 기준과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사회적 자아’를 내면화하며 자아를 억압한다.
- SNS와 사회 구조는 ‘보여지는 나’에 집착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진짜 자아는 점점 희미해진다.
- 정체성 혼란은 ‘나로 살고 싶은 욕망’과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사이의 충돌에서 발생한다.
- 나로 살기 위한 철학적 실천은, 타인의 시선을 인식하면서도 나의 감정과 욕망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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